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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한국에서 못사는 사람이나 가는거아냐? 알 만하다

사적인 이야기/나의 1020 스토리

by 김이김 2021. 10. 12.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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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서리 구부정하게 커버린 골칫거리 outsider
IU - Celebrity 

 

  외국에서 살다 보면 종종 듣는 말이다. 레즈비언인 나는 저 말에 해당되기도 하지만 정체성 확립 이전부터 이민을 희망했기에 아주 초반부의 얘기를 해보려 한다. 초등학생 때까지는 남녀 구분에 크게 다른 점을 못 느꼈던 것 같다. 유년기에 사회적 여성성이 싫었던 기억은 엄마와 집안 어른들이 조신하게 행동하며 믿음과 신앙생활에 대한 언행을 제재할 때였고 그건 집 밖을 나오면 해결되는 문제였기에 또래나 외부 사람들과의 시간에 몰입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또래 사이에서 내가 크게 다르단 생각은 안했었다. 왕따 당한 경험이 있긴 하지만 그건 다수의 아이들처럼 행동하면(=왕따 시키면) 타겟에서 벗어나는 문제로 해결했다. 본격적으로 아.. 큰일 났다. 외롭다고 깨달은 것은 교복을 만나고 나서부터다. 일단 치마를 입어야 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뭔지 모르는 상태로 일단 입었다. 또래 그룹에 일원이 되려면 같은 관심사를 공유해야 한다는 무언의 룰이 있었기에 이리저리 흔들리던 나는 꾸밈 코르셋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편승했다. 돈이 없었기에 써클렌즈를 친구들과 돌려 끼기도 했고, 번화가 로드샵을 돌아다니며 온갖 테스터를 바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끔찍한 짓이다.

  집 안에서는 바깥으로, 바깥에서는 온라인으로 도피하기 시작했다. 온라인으로 또래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함과 동시에 당시 버디버디의 미국?버젼이었던 아이.. 뭐더라.. 이름이 전혀 기억나지 않네.. 아무튼 영어로 채팅하는 메신저를 접했다. 영어로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 무언갈 좋아하는 것도 제약 없었고, 돌려 말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표현해야 했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해도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당시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대히트를 치면서 팝 음악과도 가까워졌고 드디어 내가 하고 싶은 표현을 한다는 해방감을 느꼈다. 그렇게 작은 욕망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가장 친한 친구가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다. 나는 그 친구가 너무 부러웠는데 그 친구는 부모의 사업으로 동행했기 때문에 나를 부러워했다. 이때부터 나의 착각과 자기 연민이 시작된다. 내 주변엔 유학을 쉽게 갈 수 있는, 가는, 이미 간 친구들이 많았다.. 나만 미운 오리 새끼인 줄 알고 패배감과 우울감에 빠져 살았다. 지금은 서울에 태어나 일하는 엄마를 보고 자란 내 환경도 굉장한 운이고 특권이었다는 걸 안다. 

  중학생 때 내가 누구인지, 왜 태어났는지를 고민하다 보면 정말 집을, 학교를, 사회를, 이 나라를 벗어나고 싶었다. 어떻게든 살기야 살겠지만 스스로를 속이며 평생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엄마한테 외국으로 보내달라 했다. 거기서 학교 안다니고 내가 일해서 먹고살 길을 찾을 테니 보내만 달라했으나 외국에 연고 없이 중학생을 보내줄 리 만무했다. 난 정말 삶에 대한 의지가 없었기에 고등학교를 가고 싶지 않았다. 남들이 사는 대로 살기 싫었다. 어떻게 되든 나답게 살아서 나를 교정하려 했던 당신들이 틀렸다고 증명하고 싶었다. 엄마와의 첫 딜이 시작되었다. 일단 고등학교를 마치면 보내주기로 했다. 경제력도 뭣도 없었던 내 입장에서는 그 약속을 믿고 3년을 버텼다. 그러면서 영어권 나라인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의 정보들을 찾았다. (왜 영국은 생각도 안 했는지 의문이다..)  

  나는 학교 친구들과의 관계를 초등학생 때부터 어려워했기 때문에 남들처럼 살아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나이에 맞춰 대학 가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임출육하고, 엄마처럼 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버지의 부재는 그랬다. 내가 사회가 정한 틀에 맞추면 틀만 남아버린다는걸 배우게 했다. 많은 딸들이 출산 전 엄마에게 나를 낳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https://youtu.be/LzJw94h_PCQ) 나도 엄마한테 무한한 죄책감을 느끼지만 동시에 엄마처럼은 절대 살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다.

  82년생 김지영에 나왔던 말처럼 엄마는 날 강단있게 키웠다. 사업가인 배우자 때문에 평생 육아와 가계를 책임졌다. 나는 충동적이고, 욕심이 많지만 엄마의 꾸준함도 가지고 있다. 행동하고 그것을 꾸준히 해내는 능력이 있다. 무작정 남들처럼 살겠다는것이 아니라 그러면 나는 무엇이 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뭘 하고싶은지에 대해 치열하게 부딪혔다. 숱한 실패를 겪었다. 내가 알던 내 모습 중에 진짜 '나'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자기만족으로 꾸미는것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액세서리와 화장품, 옷들을 사느라 시간을 다 보냈다. 왜 좋아했나? 그 옷을 왜 사고 싶나? 이런 사람이 되고 싶은데 왜 그러고 싶나? 내가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내 취향들조차 그것이 왜 좋은지 끝까지 묻다 보면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많이 경험해보고, 많이 상처 받아보고, 많이 실패했다. 

  산다는 것은 내가 누구든, 어디든 선택의 연속이다. 뭔갈 택하면 뭔갈 잃어야 한다. 과정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결과를 책임져야 한다. 이것이 메타인지의 첫 시작이다. 감정에 휩쓸리다 보면 정당성만 찾게 된다. 이런 이래서, 저건 저래서.. 무수한 이유들에 집중하면 남는 게 없다. 그냥..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 정도의 사람이란 걸 인정이라도 해야 하는데 변명쟁이일때는 그냥 다 억울하고 속상하고 갑자기 기쁘고 소비로 도피하고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한때는 제목에 썼던 말들에 상처를 받기도 했다. 실패자인듯한 뉘앙스에 반박하고 싶었다. 아니? 난 아닌데? 자동반사적으로 대응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그러라그래.. 그런가 보다 그리고 끝낸다. 뭔가에 대응을 한다는 것에 대해 잘 생각해봐야 한다. 기어이 반박하고 싶은 그 심리의 기저에는 뭐가 있는지 스스로 들여다봐야 한다. 기존의 세계들을 깨고 나와야 한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누가 대신 살아줄 수도 없고, 종국엔 혼자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오늘을 살기까지의 과정들을 돌이켜보면 앞으로의 방향도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 명확해진다. 

  셀러브리티 가사에서 나의 세상은 원가족이었다. 모서리에서 구부정하게 큰 아웃사이더가 나였다. 마귀에 씌었다며 나를 바꾸려 하던 곳에서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는 것이 살 길이 되었다. 세상에 정답은 없다. 그것이 있다 느껴진다면 당신의 틀을 과감히 깨부숴도 된다. 그 세계에서는 채우려 할수록 비워질 테니까.

출처 (https://m.blog.naver.com/bgahee/22252267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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