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내가 동성애자라니? 레즈비언이 뭔데?

사적인 이야기/나의 1020 스토리

by 김이김 2021. 10. 10. 08:25

본문

반응형

모태신앙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장녀로 태어났다. 굉장히 큰 장단점을 시사한다. 장점은.. 제사문화를 전혀 모른다는 점이다. 우리 집안은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명절에 모여서 점심 먹고 놀다가 저녁 먹고 헤어졌다. 어릴 때는 큰엄마들과 윷놀이도 하고 사촌오빠들이랑 놀이터 가서 엄마가 평소에 안사주는 간식도 얻어먹고 꽤 재밌게 놀았었다. 남자 어른들은 큰 방에서 할아버지 입회하에 정치경제어쩌구저쩌구 얘기를 했고 여자 어른들은 이런저런 사는 얘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었다. 아버지가 막내고, 내 위로는 남자들만 있었기에 나는 막내아들이 낳은 예쁜 손녀딸 포지션이었다.  그래서 사회에 나와 남아선호사상이 아직도 있다는 사실을 봤을 때의 충격은.. 어릴 때부터 온갖 알바를 했기에 참 많은 여자들을 만났다. 이렇게 저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현실감과 사회성을 익혔다.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여성의 노동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공고히 쌓여있는지 몰랐다. 이런 배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내가 살아온 세상은 내가 굳이 여자라서 힘든 세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남녀 테이블, 순서 나눠 밥을 먹는데도 몰랐다. 그냥 원래 그런가 보다 했다. 내가 하는 일이 아니니 내가 부당하게 느낄 틈도 없었다. 

 

단점은... 친가, 외가 조부모님들과 같은 교회를 다녔다는 것이다. 내가 하는 언행은 내 이름으로 붙는 것이 아니라 ㅇㅇㅇ의 손녀딸로 불렸다. 걸음걸이, 식사법, 눈빛, 말투, 옷차림 머리부터 발 끝까지 제재받았다. 내가 잘못하면 내가 혼나는 것이 아니라 엄마가 힘들어졌다. 오은영 박사님이 시험을 못 봤을 때 내가 혼날까봐 걱정하는 아이와 부모가 속상할까봐 걱정하는 아이 중에 더 건강한 애는 내가 혼날걸 걱정하는 애라고 말한 적 있다. (시험이 아니라 다른걸지도 모른다.. 정확하지 않음) 애정결핍과 수동공격성 기타 등등.. 나 같은 장녀 한녀들 많더라 우리 잘 먹고 잘 삽시다 시시때때로 내가 제일 소중하다 기억하기 약속

 

 

나는 항상 엄마를 걱정했다. 아버지가 집에 없었기 때문이다. 일 하느라 집에 안들어왔다. 교회 가는 일요일에만 왔다. 다른 요일에는 사업장 근처의 숙소에서 생활하며 지냈다. 엄마는 도와줄 사람 하나 없는 서울 바닥에서 갓난쟁이 애가 아파서 응급실을 가야 했을 때 배우자를 찾기보다 주님을 찾았다. 엄마가 정신적으로 기댈 곳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믿을 수 있는 종교였다. 베이비부머의 세대가 살아온 환경을 생각해보자. 정해진 나이에 정해진 일을 하듯 나를 낳았을것이다. 아이를 키우기 위한 필수 전제조건인 사랑과 애정, 주양육자 두 사람의 노력보다는 혼기가 찼고 조건이 얼추 맞으니 결혼을 하고 결혼을 했으니 애를 가지는 그런.. 그 시절의 평범한 두 사람이었다. 사업하는 아빠는 항상 일했고, 집에는 술에 취해 들어왔고, 새벽 3시에 거래처에서 영덕대게를 받았다며 자던 나를 깨워 술친구를 시키던 사람이다. 나는 대여섯살이었다. 아마 그 대게도 대금 대신에 받아왔을 가능성이 높다. 엄마는 결혼 후 경력단절 여성이 되었고 나와 3살 터울의 동생을 낳았다. 내가 어린 시절을 5살 무렵부터 기억하는 이유는 그 즈음부터 엄마가 일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에는 집에서 5분 거리인 동사무소 내 서점에서 판매 일을 했고 거리가 가깝다 보니 나는 놀이터에 간 듯 엄마의 직장에서 날고 기고 뛰었다. 시간이 흘러 동생이 뛰어다니고 내가 동생을 챙겨야 한다는 책임 의식이 생길수록 엄마의 직장은 멀어졌다. 잠시 어딘가에 맡겨질 때에도 나는 동생을 책임져야 했고, 엄마가 부재할 때는 내가 동생의 보호자가 됐어야 했다. 

나도, 동생도, 엄마도, 나와 가장 친하던 친구도 모두 여자였다. 나는 여자와 사는 것이 익숙하고 당연했다. 여자가 생각하는 사고방식, 사용하는 화법,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 온 세계가 여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니 근데 내가 동성애자라니? 레즈비언이 뭔데?! 청소년기의 나는 그저..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왜 태어났는지에 대한 답을 찾아 헤매고 있었기에 이런 정체성을 성인이 다 돼서 인정한다는 것은 나의 세계를 또다시 리밸런싱 하는 작업이었다. 나는.. 내가 여자가 좋아도 이성애잔줄 알았지.. 내가 남자를.. 아이돌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나 진짜 남자 사랑하는데!?!? 이성애자 되려고 노력 정말 많이 했다.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남자를 경험했고 끝내 절대 이성애자가 아니라는 셀프 확인사살만 반복됐다. 삶의 궤적을 돌이켜보면 당연한 결과다. 남자를 애정 대상으로 볼 수 없는데 무슨... 역할놀이 수준의 관계를 맺고 끊음에 지루함을 느끼면서도 이것을 인정하기까지는 장장 4년이 걸렸다. 최종_최종_최종_최종의 관계를 정리하고서야 나는 레즈비언이라는 결론을 가지게 된 것이 허탈했다. 정말 안되는 거였다니. 

내가 이렇게나 끝내 깨달은 것은 나 자신을 몰랐기 때문이다. 언제 가슴이 뛰는지, 언제 살아있다 느끼고, 무엇에서 성취감과 만족감을 느끼는지 깡그리 무시하고 바깥세상에 나를 맞추려고만 했다. 내가 레즈비언이고 이성애자고 뭐고가 중요한게 아니라 나 스스로를 알려하지 않고 기준을 바깥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했는데 오랫동안 몰랐다. 그럼 난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나를 속이거나 남을 속여야 하는데 뭘 선택해야 하나. 내가 다 참고.. 남들도 다 그렇게 사니까 나도 그렇게 살아지겠거니 살아야 하나 아니면 내 주변을 다 태워서라도 내가 선 땅에 나로서 존재해야 하나 또 다른 고민을 시작했다.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까지가 오래 걸렸지 사실 받아들이고 나서부터는 뒤도 안 돌아보고 전력질주해서 기존 상황에서 벗어났다. 본가에서 멀어지면서 무서웠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안정적으로 잘 지낼 수 있는데.. 어른들의 인형이 되면 이런 고생안하고 살 수 있을 거 같은데..라는 생각보다 거기서 살면서 속으로 썩어가고 있을 나의 미래, 몇십 년을 더 살아야 할 인생이 더 자신 없었다. 인생의 어느 선까지 나의 동력은 무한한 공포였다. 부모세대가 여기서 삐끗하면 낮은 계급으로 떨어질 거란 공포에 사교육 시장으로 자식들을 내던지듯 나는 종교에 미쳐버린 그 세계로 내 인생을 흡수되게 할 수 없다는 공포로 열심히 살았다. 행복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그저 그 가족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공포가 채워졌다. 

레즈비언이 뭐야? 남돌 알페스나 하던 나에게 레즈비언이란건.. 남타쿠들이 그의 배설 같은 욕정을 내뱉는 한 장르로 알고 있었다. 뭐 인터넷에 검색해보고.. 그냥.. 잘 모르겠다.. 별 생각 없었는데 사회에서 만난 여성과 일하다 보니 또 스파크가 튀고.. 그냥.. 살면서 여자들을 만날 기회가 많다 보니 자만추가 자연스레 이어지고.. 아.. 이런 건가보다 알기 시작하면서 이쪽 업소 다니고.. 돌덕질 하면서 또 레즈 만나고 반복의 반복을 하다 보니 어느새 체크셔츠 입고 있는 레즈비언이더라. 

그렇게 어언 10년차. 원가족으로부터 독립 이루고, 오로지 나로서 나의 인생을 나의 가족과 행복하게 살고있다.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